특별인터뷰…일제강제동원 여자근로정신대 투쟁 벌이는 양금덕 할머니

윤석열정부 제3자 변제 추진에“외롭게 싸워온 노파들 끝까지 기만하나?”정면 반박

▲아흔다섯 노구에도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강제노역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겠다고 다짐하는 양금덕 할머니
▲아흔다섯 노구에도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강제노역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겠다고 다짐하는 양금덕 할머니

똑똑하고 야무졌던 나주의 단발머리 소녀 양금덕, 아흔다섯의 노구에도 여전히 야물고 꼿꼿한 양동할매 양금덕 할머니는 말한다.

“사과는 죄진 놈한테 받는 것이고, 배상은 일 시키고 띠어묵은 놈한테 받는 것이제, 뭘라고 우리 국민들 돈을 쓴다요? 굶어 죽어도 안 받어라우.”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일제의 한반도 불법 강점과 이로 인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 중 하나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강제동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이 피해자 개인에게 불법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시한 것.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6일 이같은 대법원의 판결을 ‘제3자 변제안’으로 사실상 무효화 했다.

정부가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자,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의 사과와 반성 없는 돈은 받지 않겠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양금덕 할머니다.

▣ 중학교에 진학해 선생이 되고 싶었던 소녀 양금덕 

올해 아흔다섯 살인 양금덕 할머니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다. 
 

나주초등학교의 전신인 나주대정공립심상소학교에 다니는 내내 똑똑하고 야물어서 급장을 해왔던 양금덕에게 당시 일본인 교장은 “일본에 갔다 오면 중학교도 보내주고 돈도 번다”는 말로 꼬드겼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양금덕은 24명의 나주 소녀들을 비롯, 여수, 목포, 순천, 광주에서 징집된 138명의 소녀들과 함께 1944년 6월 여수에서 일본행 배를 탔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고 페인트 칠을 하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듬해 8월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양금덕은 중학교는커녕, 교사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양금덕의 10대는 가까이 지냈던 이웃과 친척들마저 일본군 위안부로 다녀왔다며 냉대와 질시의 눈초리 속에 무너져 갔다. 
 

스물한 살에 화순으로 시집을 갔지만 뒤늦게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아내와 가정을 멀리하고 아예 바깥 살림까지 차렸다.
 

여전히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고, 일본에 다녀왔다는 그 자체만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굴레가 되고 말았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듣지 못했다.

자녀들에게조차 외면당했던 것은 아닐지 미뤄 짐작해 볼 뿐이다.
  
▣ 일본정부 상대로 인권회복 투쟁 30년 산증인 

망국의 희생자로 가슴애피를 앓으면 살아온 양금덕 할머니가 비로소 속 얘기를 터놓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순을 훌쩍 넘긴 세월이 지나서였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은 1990년대부터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을 상대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양금덕 할머니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와 함께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원고로 나섰다

1994년에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여자근로정신대피해자들과 함께 ‘관부재판’에, 1999년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세 번째 소송에 나섰다.

그러나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 기각을 끝으로 일본 소송은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일본 소송은 모두 패소했지만 모든 것이 실패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양금덕 할머니는 원고로 이름만 올린 게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투쟁의 현장이라면 앞장서 달려갔다. 

이렇게 분투해 온 시간만큼, 전쟁 야욕을 위해 10대 소녀들까지 노동력 수탈에 나선 일제의 만행이 하나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알아도 ‘여자근로정신대’는 한국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양금덕 할머니의 용기와 결단은 다른 피해자들의 또 다른 고백과 용기를 끌어냈고, 결과적으로 ‘여자근로정신대’ 인권 문제를 우리 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64년 만에 받은 초등학교 명예졸업장
“명예회복과 나라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노력 인정”

양 할머니의 단칸방에는 지난 2008년 5월 나주초등학교(교장 강춘산)에서 수여한 명예졸업장이 벽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1939년 4월 1일 나주대정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일제강점기인 1944년 5월 30일 6학년 재학 중 일제 강제 노무동원의 하나인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어 갖은 고통과 시련을 겪은 사실이 있으며 해방 후 명예회복과 나라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펼쳐 온 점이 인정된다”며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던 것.

졸업을 앞두고 일본에 건너간 지 64년 만에 받은 졸업장이다.
 

▲64년 만에 양금덕 할머니에게 수여된 나주초등학교 명예졸업장
▲64년 만에 양금덕 할머니에게 수여된 나주초등학교 명예졸업장

양금덕 할머니가 구순의 노구를 이끌고 눈보라 속 시위현장에 참여하고 전국을 돌며 당시를 회고하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이야말로 아무도 회복해 주지 않는 명예를 되찾기 위한 것이고, 한일관계에 있어서 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나라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2012년 광주시가 전국에서 맨 처음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하자, 이 사례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현재 광주, 전남, 서울, 경기, 인천, 전북, 경남 등 전국 7개 지자체에서 여성 노무동원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에 피해자 보호에 나서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는 2012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해, 마침내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일본을 상대로 첫 소송에 나선 지 26년 만의 역사적 결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법원 배상 판결 5년이 다 되도록 미쓰비시는 판결 이행은커녕 사죄 한마디 없다.

일본 정부는 한술 더 떠,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를 취하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는 지난 30년간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왔다.

정작 부족한 것은 정부의 의지와 외교력 부족이었다.

▣ 정의를 향한 30년 끈질긴 도전에 응원을

30년 넘게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투쟁해 온 양금덕 할머니의 노고와 용기에 대한 보답으로 광주광역시는 ‘광주시민대상’을 수여했다.
 

정부에서도 지난해 9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할 예정이었지만 외교부의 제동으로 서훈이 보류되었다.
 

강제동원 배상과 연결되어있기때문이란다.

‘합리적 방안’을 강조하던 외교부가 내놓은 방안이 제3자 변제안으로 일본 전범기업이 아닌 한국기업의 기부금을 받아배상하겠다 것이다.
 

사과와 반성은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변제시켜주는 방안이기에 양금덕 할머니를 포함한 피해자들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고, 정부는 한일 관계개선을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한순간에 들러리가 되어버렸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하며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고 일반 시민들도 목소리를 내기 위해 1인 시위에 동참했고 전국 각지에서 정부 대신 양금덕 할머니께 훈장을 보내왔다. 
 

몇몇 국회의원들도 제3자 변제안을 막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모임을 출범했지만 만시지탄이다.

▣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

양 할머니의 일생은 올해 초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발간한 책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꿈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뒤늦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를 무릅쓰고 일본정부와 일제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명예회복을 위한 일본 소송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소송에서는 실패했지만 일본정부가 내놓은 후생연금 99엔은 새로운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양 할머니는 2012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와 서울에서 소송에 나섰다.
 

마침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가 했지만 일본정부의 방해로 판결 이행을 둘러싼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가 지금까지 법정투쟁에 매달린 시간은 장장 30년, 일본법원에서 기각 패소된 것만 9차례다.

양 할머니는 1992년 광주 천인소송 원고로 일본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을 시작으로, 1994년 관부재판, 1999년 나고야 소송에 나섰지만 각각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고, 이어 2012년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2018년 마침내 대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진실회복을 위한 싸움에 온 생을 바쳤다.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손자회사인 한국 내 법인 ‘엠에이치파워시스템즈코리아(이하 엠에이치파워)’의 자산을 추심하게 해달라고 청구했다.

▲눈보라 속에서도 일본정부에“체불임금을 내놓으라”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양금덕 할머니
▲눈보라 속에서도 일본정부에“체불임금을 내놓으라”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양금덕 할머니

소송 대리인단은 이미 2021년 9월 이 자산을 압류했으며 추심명령도 받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대리인단은 “이 사건 자산은 미쓰비시중공업 국내법인이 가진 금전채권”이라면서 “현금화 절차가 필요한 주식이나 특허권과 달리 1심 승소시 경매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채권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기업의 재원으로 이뤄질 3자 변제안을 거부하는 피해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배상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 더불어민주당의 뒤늦은 각성(?)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3월 6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관련 정부 발표에 대해 “양금덕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를 능멸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문재인 정부 때 과반 여당이던 민주당은 ‘양금덕 명예회복법’(일제강점기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 보호 및 지원법)을 국회 상임위에 상정하지 않은 채 방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양금덕 명예회복법’은 20·21대 국회에서 각각 한 차례씩 발의됐지만 여야 논의는 한 번도 없었다.

2019년 당시 김동철 국민의당 의원이 처음 발의했지만, 집권당이던 민주당의 무관심 속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한 채 20대 국회 임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21대 국회 개원 초기 민주당 윤영덕 의원이 이를 재발의했지만, 정권이 바뀐 지난해 9월에야 상임위에 상정됐다.
 

일명 ‘양금덕 명예회복법’은 양 할머니와 같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를 국가의 지원 대상으로 지정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기념사업 및 실태조사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근로정신대는 일제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제공한 여성들을 일컫는 것으로, 성 착취를 당한 위안부와는 다르다.

2018년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배상을 확정판결한 원고 15명 가운데 5명이 양 할머니를 비롯한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해방 후 위안부 피해자로 오인당한 이들은 사회적 멸시와 가정불화 등을 겪어야 했다.

양 할머니는 “그때는 근로정신대가 뭔지도 몰랐다.

결혼해서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남편의 구박을 들었고,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몇 놈이나 상대했느냐고 놀렸다”고 진술했다.
 

이런 이유로 2004년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착수했을 때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스스로 동원 사실을 감췄고 피해 실상이 제대로 수집되지 못했다.

이들을 위한 별도의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시작된 배경이다.
 

20대 국회에서는 양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기자회견도 열었지만, 민주당은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21대 국회에서도 민주당은 ‘노란봉투 법’ 등 노조지원법을 강행했을 뿐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가 워낙 소수여서 그런지 정치권의 관심 밖이었고, 그 결과 법안소위에서 한차례도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28일 광주 서구 양동 주택가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양금덕 할머니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외교부의 제동으로 양 할머니에 대한 국민훈장 서훈이 무산된 직후의 일이다.
 

양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정부의 제3자 변제안에 대해 “동냥처럼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고 밝히자 야권에서 결성된 ‘강제동원 사죄 촉구 의원모임’은 “정부 발표는 ‘일본의 사죄와 전범 기업의 배상 없는 돈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받지 않겠다’는 양금덕 할머님 등 강제동원 피해자의 절규를 철저히 무시하고 능멸한 것”이라는 입장문을 내기도 했다.

▣ 고향에서 홍어에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이 소망

▲고향에서 홍어애국에 막걸리 한 잔하고 싶다는 양금덕 할머니.
▲고향에서 홍어애국에 막걸리 한 잔하고 싶다는 양금덕 할머니.

양 할머니는 지난 2019년 11월 나주나빌레라문화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나고야의 바보들’ 상영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 나주를 찾았다.

왠지 낯설고 까마득한 추억으로 남아있던 고향에서 일제징용 당시 상황과 나고야에서 1년 남짓 보냈던 고통의 시간들, 그리고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을 때 영문을 모른 채 당했던 냉대와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근로정신대 피해배상 소송 등의 나날들을 얘기했다.
 

하지만 시간은 길지 않았고, 나주를 지척에 둔 광주 양동 주택가 그 허름한 단칸방 집에서 만났을 때도 홍어애국에 막걸리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너무 멀지 않은 봄날 고향에서 한 번 모시겠다는 인사가 빈말이 되지 않기를 다짐하며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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