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지난 23일, ‘처서’가 지나면서 이제 제법 아침·저녁 날씨가 서늘해졌다.

‘처서’가 지난 뒤의 더위는 “까마귀의 대가리가 타서 벗겨질 만큼 매우 심하다”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하루를 접하다보면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는 감(感)을 느낄 정도다.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계절.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덧없이 독서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나는 여기서 ‘독서 예찬론’을 한번 펼쳐 볼까 한다.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가 화엄종의 시조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중 “깨달았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설화가 하나 있다.

해골바가지 속의 물 이야기이다.

원효대사와 의상이 밤에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원효대사가 목이 말라 캄캄한 동굴 속에서 손을 휘저으니 무언가 물이 담긴 물체가 잡혀 생각지도 않고 마셨는데 물맛이 아주 좋았단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잠결에 맛있게 먹었던 그 물이 해골바가지 속에 고인 물이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원효가 토해 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접해왔던 이야기이다.

그리고 원효는 하룻밤사이에 해골바가지 속의 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중국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해 버린다.

그때 원효의 깨달음은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다.

곧, 모든 것의 출발점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생각을 좌우하게 하고 그 생각에 의해 행동이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

그러하기에 생각을 이끄는 그 마음속에 “무엇을 담느냐”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담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에 따라 사물을 보는 각도와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우화도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옛날 어느 나라 왕이 장님 몇 명을 불러와 코끼리를 만지게 하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하게 했는데 그때 장님들은 자신들이 만진 부위만을 가지고 그 코끼리 모습을 표현했다는 우화이다.

이 우화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얘기이다.

이 우화가 주는 의미는 “사물의 일부만을 가지고 전체를 결론”내는 위험성을 깨닫게 해주는데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해결해 주는 것도 물론 독서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의 범위를 넓히고 깊게 해준다.

특히, 인간 개개인이 모여 만든 사회 속에서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게 다원화된 사회의 모습이다. 또한, 그렇다고 그 개개인의 생각만을 존중해주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한 사회는 발전은 있을 수 없고 정체된 사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생각을 존중해주면서 사회를 발전시키는 방법, 그것은 그 사회의 개개인이 자기주장에 대한 논리를 통해 다른 사람이 내 주장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발전해 가는 모습이다.

그러한 논리와 생각을 깊고 넓게 만들어 주는 것이 독서이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빠른 게 ‘생각의 속도’란다. 올 가을에는 우리 모두, 생각의 범위를 넓히는데 한번 힘써보는 것이 어떨런지? 제안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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