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의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

▲김남철 지음
▲김남철 지음

우리는 의병, 의병장을 이런 분들로 기억하지만 몇몇 유명한 의병장만 알 뿐이다. 의병을 이끌고, 돕고, 의병에 참여한 많은 분의 자취는 그저 의병으로만 남아있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의병을 우리는 모른다’. 후손 가운데 그분들의 행적을 기리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묻히고 잊힌 채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곳이 많다.

한말의병은 1895년부터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제에 맞서 투쟁한 의병들이다. 당시 우리 강토는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운 의병의 함성과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었는데, 특히 남도, 곧 전라남·북도의 산천과 들판은 의병들의 피와 눈물로 내내 얼룩졌다.(1909년 전국 의병의 약 60퍼센트가 전라도 의병이었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에서 남도 한말의병은 너무나 소략하게 다루어진다. 전문 연구자의 몇몇 연구서 외에 일반인의 이해를 위한 책을 찾기 어렵다. 지난해 출간한 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살림터)에 이어 저자는 이 책에서 저항의 역사, 의병의 역사, 그중에서도 주축을 이룬 호남의병의 자취를 통해 수많은 한말의병의 삶과 행적을 드러내 알린다.

저자는 남도 한말의병이 일어선 시대 상황과 배경,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피 흘려가며 최후까지 싸운 남도 한말의병의 의로운 활동에 주목하여, 많은 현장을 답사하고 후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의병장들의 자취와 후손들의 힘들고 애절한 삶까지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항하는 사람기록하는 사람이 남긴 역사가 말해주는 것

()’라는 정신이 시대를 관통하여 일어난 많은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임진~한말의병에서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변기를 헤쳐간 정신은 우리를 지탱하는 시대정신이자 가치 그 자체다. ‘를 실천하며 많은 항쟁에 참여하고 희생한 이들의 자취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의가 아닌 ()’, 곧 욕심의 광풍에 속절없이 함몰되어버린 우리 세태를 반증한다.

이 책에 소개된 남도 한말의병장들은 거의 모두가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이지만 자신들이 처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당당히 일제에 맞서 의롭게 투쟁한,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많은 이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며 묵묵히 한 줌 흙이 되어갔다. 부자(父子), 형제, 부부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이들의 기막힌 사연도 있다. 한말의병들의 신산(辛酸)한 삶의 자취는 저항하는 사람의 마땅한 모습으로 별처럼 빛나고 있다.

남다른 소명의식으로 역사의 현장을 누비며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저자는 남도 한말의병들 곧 저항하는 사람들이 말하려 했던 시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새기며 그 정신을 이어가고 소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본문 속으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한 줄기인 의병전쟁은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무력투쟁이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들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 심남일은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 했다.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은 의병을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의병은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선 사람들이다.

(21-22, “위대한 독립전쟁 남도 한말의병의 길을 찾다에서)

심남일은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초야에서 십 년 동안 글 읽던 몸이/ 한번 전쟁에 나서니 죽음이 가벼웠네/ 나라의 원수를 버려두고 천지가 어두워지니/ 내 죽는 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심남일 의병장의 순국 소식을 들은 부인은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다. 부인은 눈이 있어도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세상인데, 차라리 두 눈 감고 사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91, “남도 제일의 의병장, 남일 심수택 의병장에서)

그는 광주를 거쳐 19101월 대구로 이감되어 박영근·심남일·오성술·강무경과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해산은 최후 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말했다.

내가 죽은 뒤 내 눈을 빼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93, “호남동의단 의병 투쟁의 중심 전해산 의병장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양방매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선다. (135, “부부가 의병에 투신한 강무경·양방매 의병장에서)

평범한 머슴살이를 하던 안규홍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담살이를 청산하고 의병 전선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1907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이 심해지자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안규홍 역시 법화마을 도둑을 막기 위한 조직에서 활약하며 창의의 계획을 세웠다.

그는 비록 우리가 남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라며 거병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민이었다. 의병장의 대부분이 양반 유생이던 당시 머슴 출신 의병장은 특별한 경우였다. (166, “담살이로 창의 깃발을 세운 안규홍 의병장에서)

첩첩산중 바람골 동굴에 숨어 있던 의병장들이 어떻게 붙잡혔을까? 밀정들의 밀고 때문이다. 친일파보다 더 악질적인 밀정은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 KBS 탐사 보도에서 밀정 895명의 명단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자들도 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최근에도 밀정, 요즘 말로 프락치, 스파이 논란이 있다. 양심과 신념을 저버리고 동지들을 팔아 출세하려 한 자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177-178, “의병에서 항일운동까지, 최후 의병장 강달주에서)

그러나 기산도는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면서 혀를 깨물어 버렸다. 형을 마치고 출옥했으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한쪽 다리를 못 쓰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다 192812월 장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리개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丐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묘비를 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유리개걸지사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지 선비라는 뜻이다.

(228, “거지 행세로 항일의식을 지킨 기산도 의병장에서)

최근까지 면암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논란이 계속되었다. 단식이냐 풍토병이냐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분명한 것은 면암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활동을 하다 대마도로 압송된 것이다. 또한 일본이 제공하는 음식물을 거절하며 저항했다. 이로 인해 풍토병에 걸린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춘추대의를 지키고자 노령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진충보국의 삶은 응당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그는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라고 묻는다. 우리는 이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283, “위정척사의 정신을 이은 면암 최익현 의병장에서)

저자 소개

▲소나무향기 김남철
▲소나무향기 김남철

전남 나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남 노화종고, 여천고, 부영여고, 여수화양고, 완도수고, 노화고, 나주고, 전남과학고, 완도고 등에서 30년 넘게 한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쳤다. 전남역사교사모임 회장과 전국역사교사모임 부회장을 역임했고, 통일교육, 독도교육 실천과 남도민주평화길을 주관했다. 나주학회 이사,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역사의 이해와 정리를 위해 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를 출간했고, 5·18민주화운동 인정교과서, 전남의 5·18민주화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마한, 전남의 도자기, 청소년을 위한 나주역사등의 공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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