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음자
나주시 대호동

1970년 7월 7일.
오랫동안 앓았던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하여 왼쪽 폐 한 쪽을 도려내었습니다.

내가 결핵이라는 병을 알게 된 것은 1958년. 내 나이 열네 살 그리고 중학교 이학년 때였습니다. 가슴에 통증이 있어서 X-레이를 찍었는데 폐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보다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면서 당분간 학교를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폐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을 선고받았지만 학교를 쉴 수도 없었으며 약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면서 십삼 년 동안 그저 가슴만 앓고 살았습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애타게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겉모습은 건강하여 중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폐결핵이 교사임용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그 옛날을 살았던 것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공무원 건강검진이 시작되었으며 모든 직원에게 공개되어 날아오는 폐결핵 환자라는 통보는 비수가 되어 내 앓는 가슴에 꽂혔습니다.

이렇게 숨죽이면서 가슴을 앓았던 폐병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게 되어 폐 한 쪽을 도려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폐 한쪽을 도려내는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은 버림받는 여자입니다.
이웃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와 결혼을 약속 했는데 폐병이 짙어지자 그는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나를 떠나면서 “교사는 발령장 한 장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 다른 학교로 가서 잘 살기 바란다”는 그의 말을 듣자 나는 나를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병든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 병들어서 미안하다.

난 도망갈 만큼 잘못한 것 없어. 나는 이곳에서 당당하게 살아 갈거야.’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삼켰지만 자꾸만 솟구치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나는 이곳에서 육 년을 버티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였습니다.

1976년 10월 l7일 수요일 오후 여덟 시.
장소는 내가 섬기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수요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하나님 앞과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서 우리는 부부됨을 약속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선물로 주신 하얀 한복이 웨딩드레스였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을 마치고 시집으로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하여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초라하게 결혼식을 하였지만 나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은 축복이고 감사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하여 사범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제 날짜에 내지 못하여 학비 독촉을 받았습니다.
교사가 되었지만 가난한 살림에 병마까지 겹쳐서 생활비는 언제나 부족하였습니다.

서른을 넘기는 노처녀가 되었지만 결혼할 자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결혼자금을 마련하려고 은행을 털다 붙잡혔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가 평생 간직한 구리반지를 보석으로 여기며 결혼식을 올린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난함이 결혼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불편한 가난을 극복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모든 형식을 뛰어 넘어 나만이 할 수 있는 결혼식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시골교회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인 시골로 내려와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성도들이 이십 명쯤 되는 작은 교회이기에 우리는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남편의 야간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결혼 비용이 오백 원이었는데, 그 비용은 결혼식장으로 가기 위해 이용했던 택시요금이었답니다.

“지금은 가난하여 살림도구도 없이 결혼하지만 함께 힘을 모아 필요한 가구를 장만하면서 그 옛날 가난한 삶을 아름답게 추억하자.”
그가 말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그의 생각이 내 사상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염려하는 나에게,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인데. 당신이 죽을 때, 내가 꼭 안아 줄 테니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평안히 눈을 감고 하늘나라 가세요.”

그리하여 아름다운 결혼 행진곡도 없이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이렇게 쉽게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육 남매의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납작한 초가집에 마루는 삐걱거리는 대나무 평상이었습니다.

천장이 낮아서 평상에서 허리를 펴고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남편을 사랑하므로 이 가난도 내 몫이라고 수없이 다짐하였습니다. 나는 목사님께 사랑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하는데 시아버님께서 나를 성도로 인정하지 않으면 나의 신앙생활은 헛되다는 믿음으로 아버님을 섬겼습니다.

내가 결혼한 지 이 년째가 되었고 막내 도련님이 아홉 살 때에 시어머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나는 이제 형수가 아니라 어머니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이 어린 동생들의 진로를 결정할 때마다 ‘내 아들이라면?’ 이렇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2002년. 아버님께서 팔십이 세의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리는 함께 살았습니다. 다섯 남매는 모두 훌륭하게 장성하여 자기의 삶의 터전을 찾아 고향을 떠나 나보다 더 넉넉하게 잘 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가슴앓이는 끝이 없습니다. 폐병은 영구 완치가 아니라 약을 한 움큼 삼키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을 것이라는 약함이 나를 언제나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정년퇴임은 이룰 수 없는 나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8월 31일.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폐 한쪽으로 가쁘게 쉼을 쉬면서도 사십삼 년의 교직생활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황조근정훈장을 목에 걸고 아이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축복과 사랑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돌아다보면 나의 교직 생활의 사십삼 년은 폭풍이 몰아치는 거친 광야 길이었습니다.

이 험한 길을 헤치며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남편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깨진 유리그릇을 보듬듯이 나를 아끼고 살펴주는 그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눈이 오는 날이면 따뜻한 외투를 들고 교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던 남편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농사꾼, 몹쓸 폐병, 연상의 여인 어느 것 하나도 결혼할 조건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일구어냈습니다.

초라한 초가집은 살기 좋은 아파트로 변했고 살림가구는 편리 할 만큼은 있습니다. 달콤한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지만 인생의 긴 여정에 아름다운 사랑의 발자취를 남기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몸이 허약하여 아기를 갖기가 어렵다고 걱정을 했지만 아들은 바르게 자라서 대학교 교수를 목표로 박사학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엄마’ 라는 아들의 고백이 박사 학위 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합니다.
나는 나에게 “정음자, 너는 결혼을 참 잘 했어. 그리고 매우 잘 살았어.” 칭찬을 하면서 금메달을 내 목에 걸어줍니다. 메마른 땅에 사랑의 꽃을 피워낸 바로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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