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살펴보고 글을 좋아하라

남평 문씨의 시조인 문다성의 설화를 분석해보면 성씨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남평 문씨들은 문(文)을 숭상하고 글에 능했으며, 다성(多省)으로 자신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선비적 기질이 강하였으며, 세상의 이치에 밝았다는 것이다.

 

남평 문씨들은 이 바위에서 시조가태어났다고 굳게 믿고 1851년에 문약연(文躍淵)이 높이 1m가량의 비에 문암(文岩)이라 새겨 바위 위에 세웠고 1928년에는 문낙홍(文樂洪)이 중심이 되어 암각(岩閣)을 지었으나 문화재와 경관이 맞지 않기 때문에 헐고 새롭게 문암각을 지었다.

이 바위의 크기는 경사지에 있어서
 앞에서 보면 그 높이가 6m, 폭 5m
에 이르나 뒤에서 보면 1m 정도의       
바위다.

이 문암에 얽힌 전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씨족설화(氏族說話)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남평 문씨 후손들은 1993년 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설단하고 매년 3월20일 단제를 모시며 장연서원에 배향하여 9월 중정일에 유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무성공 휘 다성은 묘소가 전하지 않아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암바위 옆에 설단을 하였고 매년 3월 20일 전국의 일가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문암은 전남 민속자료 32호로 시조단의 서쪽이며 문암각을 지어 문암을 보호하고 있는데 2004년 단청 작업을 마쳤다.

문암의 유래가 된 장자못은 1970년경에도 고기가 많아 수렵도 하고 시조단의 앞으로 배가 다녔으나 토사가 쌓여 매립이 되어 주변은 논이 되었고 단소 입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장연서원은 문암에서 직선거리로 300m 정도 정면 쪽에 있다.

문암 앞의 제단비명은 다음과 같은 비명이 적혀 있다. 이가원 문학박사의 글이다.

 

가문이 혁혁하면 반드시 뿌리를 찾는다

 

운운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 1732년)에 이르러 처음 수보(修譜)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하였다.

 남평군 동녘에 한 대택(大澤)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讀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내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성신(星辰)처럼 맑다 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 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 밑 지석강 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員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남평 문씨 중세는 고려 때 많은 인물이 태어나 우산기상시 문익의 두 아들 평장사 문공원과 예부상서 문공유가 있었고, 공유의 아들 문극겸은 명종 때에 상서, 평장사 등을 지내면서 근면 충직한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문하시중 문정은 대학자였다. 문공유의 7세손인 예문관제학 문익점은 중국으로부터 면화종자를 가져왔고, 그 손자 문래는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하여 의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문빈은 무신으로 조선조 초기의 제2차 왕자란에 공신으로 대장군에 승진되고 울천군의 훈작을 받았다.
정조 때에 문계동은 시와 복술로 유명하였다.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자인 문재인(1953년생) 후보도 남평 문씨이다.  그리고 나주시 의회 문성기(1947년생)부의장도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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