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이 없었던지 저와 전남타임스 독자들과의 만남이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사 관계자들과의 인간적 어울림으로야 어줍잖은 저의 글이지만 진즉 전남타임스에 실렸으련만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 먹은 대로가 아니라는 걸 다시 배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물의 성질에 대해 이모저모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물은 막히면 돌아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 바위가 있으면 뚫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깊은 웅덩이에 빠지면 무리하게 넘어가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남의 물이라도 보태 넘어갈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립니다. 때를 기다리는 거죠. 그랬던가. 저의 글을 전남타임스에 올리게 된 것은 이제 그럴 때가 된 모양입니다.

저는 지난해 9월,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암이라는 공포로 인해 살 궁리보다 죽을 궁리를 더 많이 했습니다.

찬비 내리는 허허벌판에 벌거벗은 채 홀로 방황하는 무서움과 외로움에 떨었습니다.

때 맞추어 그때에 암 중에서 췌장암이 아주 고약해 수술을 해보았자 5년, 생존율이 6.5%라고 텔레비전과 신문이 같이 떠들더군요.

거기에 앞으로 6개월이나 길어야 1년을 살 수 있다고 제 생명을 재단하는 췌장암 전문교수의 말은 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참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고 제 자신과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래 도서관에 가서 책도 열어보고 글쓰는 것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췌장암이다 뭐다 하며 우울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어서지요.

특히 수필은 허구적이거나 기술적인 글이 아니고, 정직하고 솔직한 글이므로 글을 통해 글쓴이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를 전혀 모르는 독자들에게 저에 대해 조금 귀뜸해 드리면 제 글의 분위기를 가닥 잡는데 편하시겠다싶어 미주알고주알 허튼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번갈으며 입원날짜가 길어짐에 따라 안 그러려니 해도 죽음에 대한 방정맞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늘그막의 노인들이 온 몸이 아프다고 한숨 섞인 푸념들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치 오래된 자동차가 여기저기 고장이 나듯이요.

그래서 늙어서는 화장실이라도 내 발로 걸어 다닐 수만 있어도 큰 복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Ⅱ

 

이제 저의 몸은 가을 풀잎처럼 서서히 시들어 갑니다.

마음도 짝이 없어 허약해집니다. 특히, 한해가 저무는 12월의 사람들은 너나없이 쓸쓸해 보입니다.

홀로 허적허적 걷는 사람의 뒷모습이라니….

그러나 몸도 성치않고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도 없어 허전한 병상의 12월의 저에게는 이맘 때 쯤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50여년전 중학시절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준 친구입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카드였습니다. 그때의 기분이라니!

회상해보면 그 시절 크리스마스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들썩들썩했습니다.

아니지 않는 교회 앞이라도 서성이고 싶게 흥이 넘쳤습니다.

이제 ‘징글벨’은 옛 유물처럼 듣기조차 어렵습니다. 참 조용해졌습니다

. 하느님도 늙으셔서 기운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세월이 빠릅니다.

 화살처럼 50여년 세월이 흘러 아스라져해버린 중학시절!

그때는 시대도 순진했습니다.

사람들도 순진했고 친구와 저도 그랬습니다.

 인간이 누구를 좋아하는데 요즘처럼 조건을 달아서는 안됩니다.

 어느 날 그 조건이 소멸되면 관계도 허물어지기 때문이지요.

친구와는 학창시절을 넘어 젊음내내 알콩달콩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좀 엉뚱한 데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닦은 전광과 관계없이 인조가구에 손을 대더니 그것도 치우고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떠났습니다.

친구는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헤어져 있으면서 우리의 우정을 이어온 것은 친구가 걸어온 전화였습니다.

통화료 든다고 저한테는 당최 전화를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친구의 전화번호를 모른 채 지금까지 받기만 하는 전화를 한 샘이죠.

그러다가 전화가 끊긴지가 5~6년이 되었습니다.

보름 전 쯤 일입니다.

제 전화기에 국제전화라는 문자가 떴습니다.

 보이스피싱이다뭐다 세상이 수상한 일이 많아 통화하고 싶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전화올 일도 없고 잠깐 스치는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니? 친구였습니다.

순간 저는 50여년 전 중학시절 소년이 되었습니다.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반갑고도 반가웠습니다.

수소문 끝에 바뀐 제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며 저의 근황을 죄다 알고 있었습니다.

통화 중에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오래동안 멀리 헤어져 있어도 너는 항상 내 마음 속에 있다”면서 “그동안 너는 나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 친구”라고 했습니다.

한 달 가까이 병상에 누워 창문 너머로 우울한 ‘겨울하늘만 바라보던 저는 친구의 말을 듣자 목소리가 갈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헤어져 있어도 늘 마음 속에 있다니? 저는 행복합니다.

그 후로 친구도 형편이 넉넉지 않을 텐데 적지 않은 병원비를 보내왔습니다. 친구의 전화가 기다려집니다.

 전화가 기다려지는 친구가 있어 행복합니다. 어제 전화가 왔습니다. 저를 보러 내년 여름에 미국에서 오겠답니다. 아내한테도 하락(?)을 받았다고 좋아라 합니다.

여름이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몹쓸 병으로 심약해진 저는 걱정이 많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크리스마스를 맞이 할 지 모릅니다. 혹시 이번 크리스마스가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아직 들숨과 날숨을 쉬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중학시절 처음으로 예쁜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 준 보고 싶은 친구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김수평

전남타임스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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