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만 장에 나오는 사람들 안 좋아. 그래도 워쪄? 투표는 해야제?”

장날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 세세하게 전하는 목사고을시장 시사만담가 &강진상회 김공자 할머니 “강진은 탯자리, 나주는 뼈를 묻을 영원한 고향”

▲김공자 할머니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불리는 오일장은 지방에서 열린 ‘향시(鄕市)’의 한 형태로 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심해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오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이 흐르는 남도에서 최초로 장시(場市)가 섰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1470년(성종1년)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의 시포(市鋪)가 나주에서 처음 열렸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나주와 무안의 장시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장문이었다는 것. 면면히 내려오던 오일장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위축되기는 했으나, 오늘날까지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2년 전 나주 오일장과 매일시장이 합쳐져 만들어진 오늘의 목사고을시장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이라는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남도의 물산과 경제, 서민대중의 문화와 소통의 근거지였던 나주장, 전남타임스와 나주목사고을시장 문화관광사업단(단장 조진상, 동신대 교수)이 공동기획으로 서민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역경제의 한 축을 맡아왔던 목사고을시장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고추 보다 매운 시집살이라지만

고개고개 넘어가도 또 한 고개 남았네
넘어가도 넘어가도 끝이 없는 고갯길
세상살이가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

사랑하는 정든 임과 둘이라면
백년이고 천년이고
두리둥실 두리둥실 살아가련만
세상살이가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

우연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까? 지난 9일 나주장날을 맞아 목사고을시장 입구에서 고추전을 운영하고 있는 김공자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장에 들어서는데 주차장 한 쪽 리어카에서 웬 고추노래가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누가 부르는 노래예요?” 하고 묻자 “예쇼, 하나 사서 들어보쇼. 신바람 춤바람 날 것인께”하는 아저씨. 살 것까지야 없고 슬쩍 표지를 살펴보니 ‘국민가수 유지나 골든스페셜’에 수록된 곡이란다.
어느 지방에서 구전되는 ‘시집살이’ 라는 민요에 ‘...시집살이 개집살이 고추 당초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하는 노랫가락에서 따 온 노래가 아닐까 싶다.

피식 웃음을 머금고 김공자 할머니를 찾아가는 주변은 온통 붉은 고추밭이다. 올해 마늘, 양파가 풍작이라더니 마늘, 양파, 고추가 한 데 어울려 3색의 매운 향을 뿜어내고 있는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스물아홉 나이에 나주 찾아 44년 흘러

가게상호도 없이 노점을 하고 있지만 나주장에서 고추전을 펼쳐온 지 44년째라는 김공자(74·나주시 남외동)할머니. 나주시 남외동 옛 나주역 가는 길목에 ‘강진상회’라는 고추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서 강진댁으로 불리고 있다.

강진 칠량면 출신 처녀와 군동면 출신 총각이 만나 한 가족을 이루고, 비단장사를 하던 중 나주장에서 젓갈장사로 기반을 잡은 언니 김용님 씨의 권유로 나주에 이사를 왔다. 이때 나이가 스물아홉. 두 아이의 엄마였다.

이때부터 시작한 고추장사이니, 벌써 44년 동안 고추 속에서 살아 온 셈이다. 그러다 보니 고추에 있어서는 가히 박사학위라도 받아야 할 만큼 도통한 심미안을 가졌다.

고추의 생김새와 빛깔만 보고도 나주 동강산인지, 보산동산인지, 영암 시종산인지 알아 볼 정도라고. 지역마다 고추의 특징이 있지만 나주에서 생산된 고추는 특유의 매운 맛이 적은 큰 고추로 살짝 단맛이 난다고 한다.

3, 4년 전만 해도 한 근에 2만원까지 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8천원이 고작이다. 그것도 손님이 깎자고 하면 예외 없이 깎아줘야 하는 것이 시장 인심 아니던가.

고추값, 비싸도 탈, 싸도 탈

김공자 할머니가 기억하는 우리나라 고추의 최대 황금기는 1978년도의 일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좋았던 시절은 아니고 고추파동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당했던 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때는 아예 국내산 고추를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고 결국 인도, 멕시코 등으로부터 수입했다는 모양도 다르고 맛도 맵기만 한 이상한 고추를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시절 고추 한 근을 보자기에 싸서 나주장에 내다 팔면, 이런저런 부식거리도 사고, 고무신도 사고,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도대체 고추 한 근이 얼마였기에 그럴 수 있었는가하면 그때 가격으로 무려 만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요새 물가로 치면 대충 6~7만원은 족히 될 것이라는 것. 그때 생긴 고추의 별명이 ‘금추’였다고.

이와는 반대되는 고추파동도 있었다. 1997년 IMF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그 때, 이제는 고추값 폭락으로 농민들이 고통 받았던 파동이었다.

그 때 고추 상품 1근 600g 가격이 2,200원으로 아예 고추수확을 포기한 집이 한 두 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해 고추수확에 나선 할머니들의 하루 일당이 2만원에서 2만2천원 정도였으니 하루 일당으로 약 10근의 상품 건고추를 받아가는 셈이었다.   

이같은 고추역사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김공자 할머니의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가져가시면 도리가 없제. 태풍 쳐서 가져가시고, 가뭄으로 가져가시고... 사람들이 좋은 시절에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농사가 좀 안 된다 싶으면 하늘을 원망하거든. 그러면 안 되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 할머니의 계산은 그래서 단순하다. 하루 40만원 벌이를 할 때는 사람들이 돈을 잘 벌어서 고추농사꾼 좋고, 고추장사도 좋은 것이라고.

그러다 하루 3만원 벌이도 못하고 들어가는 날은 “어째 세상이 팍팍 한갑다”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좋은 고추 고르기 김 할머니의 팁

고추와 함께 울고 웃는 세월을 살아 온 김공자 할머니가 제시하는 좋은 고추 고르기 레시피를 공개한다.

먼저, 마른고추는 표피가 매끈하고 주름이 없는 것이 좋다. 색깔과 광택이 선명하고 윤기가 있어야 하며, 꼭지가 단단히 붙어있는 것이 좋은 고추다.

풋고추는 크고 푸른빛이 자르르 한 것이 좋지만 몸매가 곱고 껍질이 매끈하고 두꺼우면서 연한 것이 좋다. 대게 1~7월에 나오는 고추는 매운맛이 강하고, 8~12월의 고추는 매운맛이 약하다.

홍고추는 어떤가. 밝은 적색으로 광택이 강하고 매끈하며 꼭지의 신선도가 양호해야 하며, 껍질이  두껍고 통통하며 속의 씨앗이 적은 것이 좋은 고추다.

하지만 좋은 고추 고른다면서 이 고추, 저 고추 만져보며 하루 종일 시장 싸돌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김공자 할머니한테 가서 “좋은 고추로 주세요!” 한마디 하면 “끝”.

시장에서 세상을 읽다

김공자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7·30 나주·화순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줄줄이 몰려왔다가 줄줄이 빠져나간다.

올해 6월과 7월 연거푸 선거를 치르면서 시장에도 부쩍 손님이 늘었다. 그러나 시장 사람들 호주머니에는 전혀 도움이

김 할머니는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다들 어엿하게 장성해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 큰딸은 서울 대학가에서 상가건물을 운영하며 부족함 없이 살고 있고, 작은딸은 자식농사를 잘 지어 외국어고등학교 다니는 자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란다.

아들은 광주에서 법무사로 활동하며 제법 유명세를 누리고 있고, 며느리가 하루에 한 번씩은 잊지 않고 안부전화를 하며 살갑게 구는 바람에 고부간의 갈등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김 할머니와 얘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휠체어에 나인 든 어머니를 태운 딸이 시장을 두 바퀴째 돌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변 상인들의 얘기를 들으니, 올해 백 한 살의 나옥례 할머니의 유일한 낙은 장날 휠체어에 몸을 싣고 딸들의 손에 이끌려 장구경을 하는 것이라고. 그러다보니 객지에 사는 딸들이 장날이면 순번을 정해 찾아와 어머니의 장구경  당번을 서고 있다 한다.

그러고 보니, 나주장에는 효녀, 효부도 많고, 그런 아들딸을 키운 우리 엄니, 아부지들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끈으로 숯과 고추를 끼운 금줄을 문간에 걸어놓는 액막이 풍습이 생각난다.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에도 고추와 숯으로 해로운 세균과 이물질을 없애 아이가 건강히 자라도록 돕는 전통이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지금이야 아들 낳았다고 고추를 걸어 놓을 일이 없지만, 어릴 적 5남2녀의 대가족이었던 우리집은 내 밑으로 막둥이 동생이 태어나자 금줄을 쳐 놓고 동네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던 기억에 지금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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