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 새절, 산기슭 초가삼간에 묻혀 살던 선비들

▲조명준/수필가
내 고향 나주에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집이 셋인데, 대밭에 둘러싸인 박 처사의 집이 그 하나요, 부첫머리 산자락의 외조부께서 기거하시던 집이 그 둘이며, 나의 증조모와 종조부께서 사시던 금성산 새절이 그 마지막 하나이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벼슬을 마치면 낙향하여 산기슭에 초가삼간을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나, 자의건 타의건 도회지로만 몰리는 현대인들은 설령 정년퇴직을 한다 해도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는 생활을 꿈꾸기 어렵다.

박 처사나 외조부나 종조부께서는 특별히 부유했다거나 지체가 높았다거나 학문이 깊은 선비가 아니었지만 모두 시정의 소란함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터를 잡고 한거하셨다.

나는 거기에서 자연과 벗하고 자연에 귀의하는 옛 조상님네들의 정신을 발견한다. 그분들이 마지막이었다.

앞으로는 며칠씩 쉬어 가는 별장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산그늘이나 산 속에 묻혀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까.

박 처사님 댁은 금성산 끝자락의 광활한 대밭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민가를 빠져나와 논밭을 지나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대밭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또 비탈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로 엮은 울타리를 끼고 한참 올라가면 대숲이 좌악 갈라지면서 대로 엮은 사립문이 보이고, 황토 흙이 벌겋게 드러난 음습한 길을 따라 사립문을 지나면 행랑채 마당이 나온다.

그 마당을 건너면 이기 낀 돌층계가 나오고, 층계를 밟아 올라가면 금붕어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연못과 넓은 안채 마당이 나타난다.

꽤 길쭉한 집인데 집 뒤꼍에는 소나무와 감나무, 상수리나무가 몇 그루 대밭 사이로 반공에 드높이 솟아 있다.

그 집에 들어서면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되고 오밀조밀한 구성에 놀란다.
그 집은 지금도 건재하며 그분의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외조부님은 본래 청동리 마을 안에 사셨는데 노년에 슬하의 자녀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자 부첫머리 산발치로 거처를 옮기셨다.

기와를 얹은 세 칸 집이었는데 주위에 별로 민가가 없는 독립가옥이었다.

울타리는 있는 둥 마는 둥 엉성하였고 가을이면 울타리 안팎으로 노란 국화가 소담스럽게 피어났다.
부엌 옆에는 우물과 연못이 있었고 연못에서는 금붕어들이 놀았다.

집 뒤꼍에는 대밭이 조금 둘러섰고 대밭 다음에는 끝없는 솔밭이었다.
외조부님께서 별세하시자 그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나무꾼 줄 잇던 마을이 유원지로

1987년 9월 25일자 광주 일보를 받아 든 나는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에 시선이 멈추었다.
나주시 경현리 일대를 유원지로 개발할 계획이라는 기사였다.

경현리! 꿈에도 잊지 못할 산간 마을이었다.

새절에 오르내리면서 내 발이 닳고 닳은 동네였다. 거기에서는 주로 나무꾼들이 살았다.
집집마다 빨간 감이 나무에 대롱거렸고, 동네 앞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동네 입구에는 당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고, 길손들은 주막집에 앉아 목을 축였다.
논밭 뙈기도 조금 있었지만 워낙 산골짜기인지라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도 바빴다.

경현리 골짜기에서는 날마다 땔나무를 가득 진 나무꾼들이 줄지어 성안(나주 읍내)으로 나왔다.
나무꾼들은 읍내 시장터 어귀에서 지게 작대기를 받쳤다.

너나없이 아궁이에 나무를 땔 때였다.

아낙네들은 땔나무를 쭉 사열한 다음 마음에 드는 지게를 골라 흥정을 했다.
흥정이 끝나면 나무꾼은 지게를 지고 아낙네를 따라가 부엌에 부려 놓고 돈을 받았다.
연탄이 등장했다.

나무꾼은 자취를 감추었다. 경현리도 많이 변했다.
자동차 길이 트이고 통닭집이 몇 군데 냇물을 끼고 들어섰다.

나는 지금도 기회가 생기면 친지들과 경현리로 간다.
소싯적에는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택시로 다닌다.

나는 경현리 통닭집 별채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머얼리 상산 (금성산 제일봉) 쪽을 쳐다본다.
산모퉁이에 가려 새절이 있던 곳은 보이지 않지만 손바닥만큼 보이는 새절 곁의 산비탈에는 소나무가 무성하다.

그 곳은 이삼십 년 전에 내가 시원한 솔바람을 쏘이며 책을 읽고 낮잠을 즐기던 곳이다.
이제 그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산간 마을을 유원지로 개발한다는 것이다.

통닭집 몇 군데가 들어선 것쯤은 저어할 바 아니지만 유원지로 탈바꿈해서 시멘트 냄새, 지폐 냄새에 섞여 화장품 냄새까지 물씬 풍길 일을 상상하면 아찔하다.

우악스런 문명의 발톱이 추억의 오솔길을 박박 할퀼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왜 자연 그대로를 순수하게 즐길 수 없을까.

나는 지금부터 박 처사나 외조부의 집보다 훨씬 멀리 속세에서 떨어진 종조부의 새절 이야기를 털어놓고자 한다. 새절은 광복 직후에 세워져 1966년까지 20년 동안 비바람에 부대끼다가 뜯겨졌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새절 이야기는 20 여년 저쪽에 묻혀 빛이 바래고 이끼가 돋아 전설이 되려 하고 있다.

요즘에는 깨끗한 물을 따로 사 먹어야 하고, 공기 오염도를 ppm으로 측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사실 너무나 자연과 떨어져 살고 있다.

코앞의 극심한 생존 경쟁에 휘말린 나머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쪼록 변변치 않은 새절 이야기가 도회지 생활에 찌들린 현대인들에게 한 줌의 맑은 공기, 한 사발의 맑은 물과 같은 청량제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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