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안개지만 저 아래선 구름

▲조명준/수필가
냇물 가까운 산허리를 깎아 내려 들어앉힌 새절은 정남향이었으므로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했다. 새절 마루에는 볕이 잘 들었다.

마루에 앉으면 마당 아래로 대나무 잎사귀들이 언뜻 비치고, 댓잎 너머로는 산봉우리들이 내려다 보였다.
산봉우리들 너머로는 영산강과 나주평야와 야산들, 그리고 멀리 지평선을 희미하게 가로막아 선 산맥이 보였다.

새벽이면 절 아래 골짜기에서 안개가 일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안개는 대밭을 타고 올라와 마당을 건너 마루까지 밀려들었다.

“할아버지, 이것이 안개라요, 구름이라요?”

“응, 성안 사람들이 보면 구름이지만 우리가 보면 안개란다.”
신선이 따로 없었다.

구름이 오락가락 휘감아 도는 새절에서 사시는 증조모와 종조부가 바로 신선이었다.

그러나 신선치고는 아주 배고픈 신선이었다.

별로 벌이가 없는데다가 특별한 신도도 없었으므로 부처님에게 이렇다 할 공양 한 번 제대로 올릴 수 없었다.

부처님도 항상 배가 고팠다.

새절에서 자는 날에는 으레 독경 소리에 잠이 깼다. 증조모께서는 새벽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예불을 드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증조모의 독경 소리는 너무도 청아하고 낭랑하여 어린 소년의 영혼을 높고 신성한 곳으로 이끌어 갔다.

새절의 살림살이는 매우 가난했다. 새절을 지을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금의 환향한 종조부께서는 넉넉한 재물을 지니셨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만 가고 나오는 곳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를수록 궁색해질 것은 불 보듯 빤한 이치였다.


내가 철이 들 무렵, 종조부께서는 이제 더 이상 처분할 만한 재산도 없었다.

사실 새절은 별로 돈도 필요 없는 곳이었다.

부엌방 바깥 처마 밑에 놓여 있는 디딜방아가 자급자족의 경제 형태를 잘 보여 주었다.

성안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원시 시대의 유물이 새절에서는 아직도 훌륭하게 제 구실을 해냈다.

보리를 비롯하여 웬만한 곡류는 모두 거기에다가 짓찧고 바수어 먹었다.

파란 유황불에 장죽 붙여 물고

드물게는 성안의 소풍객들이 새절 부근으로 놀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증조모께서는 그들이 버린 나무도시락 빈 껍질을 주워 씻어 말려서 유황을 녹여 묻혔다. 그것을 가늘게 찢어 유황이 발라진 쪽을 화롯불에 꽂으면 퍼런 불길이 일었다.

증조모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성냥을 한 통도 사지 않으셨다.

집 뒤의 너른 텃밭에는 고구마, 호박, 무, 배추와 함께 담배를 가꾸었다.

담뱃잎이 넓적해지면 줄줄이 엮어서 처마 그늘에 널어 말렸다가 작두로 썰어 모자간에 장죽에 눌러 담아 피우셨다.

두 분께서는 한가하면 언제나 장죽을 물고 계셨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보면 방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침침한 석유 등잔을 사이에 두고 두 분께서는 장죽을 물고 석불처럼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별로 얘기들도 없었다.

담배가 다 타면 땅땅, 재떨이에 재를 비우고 새 담배를 눌러 담았다.

유황 묻힌 성냥을 화로에 묻으면 파란 인광이 너울거렸는데 그걸로 담뱃불을 붙이셨다.

그분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세월을 불사르고 계셨다.

밤이 길어져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많은 세상이었다.

남들처럼 일가족이 오순도순 한 지붕 밑에서 지내 본 일이 드물었다.

배 불리 잘 살아 본 기억도 별로 없었다. 인생이 괴롭고 허망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런 밤이면 마주 앉아 한정 없이 담배를 피웠다.

자욱한 담배 연기를 뒤로하고 마루로 나오면 오슬오슬 한기가 들었다.

댓돌의 신발을 꿰고 토방과 마당을 지나 마당가에 서서 대밭 쪽으로 오줌을 눈다. 손톱 같은 달이 다보사 쪽 봉우리 위에서 빛난다.

발밑에 웅크린 꺼먼 산봉우리들이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린다.

어디에선가 밤새가 자지러지게 운다. 몸을 한바탕 부르르 떨고 소년은 잽싼 걸음으로 방에 들어간다.

여전히 담배를 피우기는 두 분을 등 뒤로 하고 자리에 눕는다.

다음 날 새벽이면 또 증조모께서는 어김없이 염불을 외웠고, 큰방으로는 미닫이를 통하여 법당의 향불 냄새가 스며 들어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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