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수 속에 고여 있는 무념무상의 경지

▲조명준/수필가
부엌문 곁에 물통이 있었다. 계곡에서 물통까지는 나무 홈통으로 연결했다. 계곡의 물은 홈통을 타고 졸졸 흘러 들어왔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홈통에는 푸른 이끼가 짙게 끼어 있었다.

그 물이 바로 식수였다.

수돗물이 아니니까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자연이 걸러 준 가장 깨끗하고 신선한 물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배탈이 나기도 하였다.

종조부께서는 철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마당에서 서른 발짝쯤 걸어 나가면 개울 징검다리가 나왔다.
상산 꼭대기에서 발원한 개울물은 새절을 지나 다보사 물과 합류하고, 진동(경현리) 골짜기 물과 만나서 한수동을 지나, 성안을 휘젓고 영산강으로 빠졌다.

징검다리 위에는 웅덩이가 있었다. 거기에서 빨래도 하고 세수도 했다. 웅덩이 위에서는 여름철이면 폭포수가 쏟아졌다.

소년은 새벽에 일어나 컴컴한 길을 더듬어 개울가에다 옷을 벗어 놓고 폭포수 아래로 들어가 앉았다.
한참 동안은 등줄기가 서늘하고 머리통이 부서질 듯 아프고 벼락 치듯 시끄럽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찾아왔다.
아무리 욕심 많은 속인들도 저절로 성불할 지경이었다.

비록 성불까지는 못했지만 폭포에서 나오면 소년의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맑고 가벼웠다.
징검다리 아래쪽으로 쏟아진 물은 대밭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대밭 안에는 가시덤불 속에 꽤 넓은 웅덩이가 있었다. 거기에도 대낮이면 간간이 햇발이 비쳐 들었다.

그 곳은 참으로 아늑하고 조용한 세계였다. 투명한 물속에서 피라미들은 살랑살랑 꼬리를 저으며 한가로이 유영했다. 작은 새우들은 툭툭 튀어 다녔고, 긴 수염을 가진 징거미(왕새우)는 기다란 앞발을 고정시킨 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재는 바윗돌 밑에서 엉금엉금 기었다. 바위에 붙은 다슬기들은 가재보다 훨씬 느린 걸음걸이로 소요하면서 주어진 삶을 즐겼다.

웅덩이 곁에는 바위 틈새기에 굴이 뚫리고, 굴 근처에는 여기저기 토끼 똥이 널브러져 있었다.
산토끼가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조부께서는 토끼가 농작물을 해친다고 눈살을 찌푸리셨다.
대밭에 설치한 덫에 토끼가 한 마리 걸렸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축 늘어져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내 동생은 처음 보는 산토끼가 신기해서 어쩔 줄 몰랐다.

철사를 풀어 낸 토끼를 줘 보라고 졸랐다. 종조부께서는 동생 손에 토끼를 넘겨주셨다.
동생은 귀엽다며 몇 번 쓰다듬어 보고는 토방에 내려놓았다.

토끼는 조금 기운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폴짝폴짝 몇 걸음 뛰었다. 어, 뛰네, 뛰네....... 동생은 좋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뛰네, 뛰네 하는 사이에 토끼는 이제 정말 빠른 속도로 마당을 가로질러 대밭 속으로 숨어 버렸다.

동생은 시무룩해졌다.

설이나 추석에는 아침을 일찍 지어먹고 새절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반찬과 떡과 술을 보자기에 쌌다.

가난 때문에 불화가 잦으신 부모님도 그 날만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며 걸으셨다.

싱그러운 자연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는가 보았다. 다리가 아프니까 쉬어 가자느니,
좀 더 가서 쉬자느니, 나와 어머니는 실랑이를 벌였다.

쉬다가 걷다가 경현리를 지나 산모롱이를 네댓번 돌면 멀리 새절이 나타났다.
마당가에 서 있는 토담 굴뚝에서는 실연기가 흩날리고, 새절은 대밭에 가려 지붕밖에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이---, 나는 손나발을 하고 목청껏 외쳐 댄다. 내 고함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골짜기 이쪽저쪽을 부딪치며 새절로 올라간다.

그 날은 종조부께서 미리 마당에 나와 계셨다. 누구냐아, 산에서 오래 사셔서 쩌렁쩌렁 울리는 종조부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다.

나요오---, 나는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외친다.
절을 올리고 나서 어머니는 보자기를 끌렀다. 증조모께서는 호박엿이나 고구마엿을 내어 오신다.

술상이 차려지고 종조부와 아버지는 잔을 기울이며 집안 이야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신다. 화롯불 석쇠 위에서는 떡이 구수하게 익어 간다.

증조모께서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고 증손주를 눈으로 더듬으신다. 너는 어찌 그리 이빨도 희냐, 어찌 그리 눈도 초롱초롱하냐. 어찌 그리 공부도 잘 하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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