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농장, 자동화 시설로 양송이 생산량 전국에서 최대&김용안 대표 시설투자 선구안, 어려운 현실 극복케 해

▲ 김용안 대표/ 일신농장
“멋슈름(mushroom)‘은 우리에겐 생소한 단어이다. 하지만 양송이 버섯하면 어느새 친밀하게 다가온다. 멋슈름은 서구나 일본등지에서 양송이 버섯을 일컫는 말이다. 유럽은 프랑스 루이14세 때부터 ’멋슈름(mushroom)’이 고급식품으로 알려져 지금도 구미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버섯중의 버섯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양송이 버섯’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지는 50년대 후반께이다. 당시, 양송이버섯이 시험재배에 성공하면서 정부가 본격적으로 농특사업으로 지원하면서 양송이 재배가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광주광역시와 편입되기 전, 전남 광산군 평동면엔 최초로 농가재배단지가 조성됐다.

또한 광주시 임동엔 최초로 양송이 통조림공장이 설립되면서 양송이 버섯 생산이 본격화됐다.

한때, 남부 각지에 통조림시설을 갖춘 대규모 기업재배 회사가 설립되면서 양송이 사업이 활력을 찾는 듯 했다. 하지만 재배기술의 미숙, 내수시장의 부재로 70년대 말에는 거의 폐업이 되다시피하면서 사양사업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와중에 그나마 부여, 경주 등지에 양송이 버섯 농가재배 단지가 형성되고 내수시장이 어느정도 개척되면서, 80년대 이후 점점 꺼져가는 우리나라 양송이 사업이 그런대로 명맥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같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양송이 사업에 자동화 시스템 등의 과감한 투자로 이 어려운 난관을 기회로 삼는 주인공이 있어 이를 찾아봤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학동 ‘일신농장’.

동신대에서 노안 기말리 방면으로 접어들어 4km정도 달리다보면 길가에 떡 버티고 있는 곳이 일신농장이다.

부지 3,500평에 재배면적 2,000평, 24동의 재배시설, 연간 양송이 버섯 500톤 생산.

이는 국내최대규모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국내 양송이 생산농가들의 단위생산량이 30~40kg의 생산량으로 봤을 때, 일신농장의 경우, 대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세 사람은 국내 양송이버섯재배사(史)에 산 증인들이다. 박재형씨(사진 가운데)는 서울대에서 식품관련학과를 나와 선진양송이 재배기술을  국내재배농가에  전수하며  국내농가들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이바지 했다. 사진 왼쪽은 일신농장 최병수 전무.가장 일선에서 양송이 재배에 총 감독을 하고 있다.

특히, 일신농장은 나주시 금천면에 양송이 버섯을 배지할 수 있는 농장을 따로 두고 생산시설을 전문화까지 하고 있다.

양송이버섯 생산단계가 ‘퇴비(배지)-후발효-종균심기-활착-복토-균사활착-채취’의 과정을 거친다면 배지와 후발효 단계를 금천면에 소재한 농장에서 전문적으로 발아를 시킨 후, 이를 송학동 일신농장으로 옮겨 체적화된 환경에서 기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산단계를 전문화시킨 여타 국내생산농장은 찾아보기가 드물다는 것이 전문가 박재형씨의 말이다.

이처럼 일신농장을 그 어려운 환경에서 국내최고의 양송이 버섯 생산기업으로 키워낸 사람이 김용안 대표이다.

양송이 버섯과 연관된 사람들은 김 대표가 양송이 버섯 재배보다는 양송이 버섯 유통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 대표는 지난 75년대에 나주시 금천면 원곡리 양송이 버섯을 재배하는 고모집에 놀러갔다가 일손이 바쁘다는 말에 조금 거들어 준 것이 양송이 버섯과 평생 인연을 맺는 계기가 돼 버렸다.

그렇지만 김 대표는 양송이버섯 생산보다는 유통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때 김 대표의 나이 21살. 광주 등지에서 시장조사와 함께 자료수집을 하면서 선진국에선 양송이 버섯을 많이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나라 역시 고급음식점에서 양송이 버섯을 많이 취급한다는 것도 파악했다.

당시 시대상황도 김 대표를 도왔다. 70년대에 경제성장 위주 정책이 활발하게 진행된 때라서 김 대표가 시작한 양송이 버섯 유통사업이 아주 활기를 띠었던 것이다.

김 대표는 순식간에 광주상권을 모두 장악해 버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진주, 마산 등의 상권까지 김 대표의 손아귀에 넣어버렸다.
김 대표가 이처럼 짧은 시간에 전국의 상권을 쥐게 된 것은 남다른 수단이 있었다.

김 대표에게도 양송이 버섯 유통을 놓고 상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경쟁자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100만원을 벌면 50만원을 경쟁자들과 쓰며 경쟁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버렸다.

그러다보니 80년대 중반께가 되니 이제 김 대표가 대한민국에서 전국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반열에 어느새 올라서 있었던 것이다.

당시 김 대표에겐 양송이 버섯 재배농장이 없었지만 양송이 버섯 세계에선 김 대표를 빼곤 얘기할 수가 없을 정도가 돼 버렸다.

지금의 일신농장은 김 대표가 지난 96년도에 지은 농장이다.

김 대표는 수시로 선진국의 양송이 버섯 재배농장을 둘러보고 꾸준히 여기에 투자를 해 왔다. 양송이 버섯 생산에 있어서 선진국인 네덜란드식 발효시스템을 12억을 들여 갖추는 등 선진시스템을 갖추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생산량이 평당 35kg 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일신농장은 50kg이상을 생산해 내고 있다. 남들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력 또한, 양송이 버섯재배엔 수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하지만 일신농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 갖추어진 자동화시설 때문이다.

지금의 일신농장의 규모라며 200여명 정도의 인력이 양송이 버섯재배에 동원되어야 하지만  현재 25명 정도만이 양송이 버섯재배에 투입되고 있다.

이는 김 대표가 양송이버섯 생산으로 성공한 몇 안되는 CEO로 남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신농장에서 생산된 양송이 버섯은 대체적으로 국내에 전국매장을 갖고 있는 굴지의 피자업체로 생산량 중 90%가 나간다. 모두가 국내소비이다. 

이들 피자업체들이 일신농장과 전량계약을 하고 나선 것은 물량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이 일신농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김 대표는 우리나라도 점진적으로 식생활이 고급, 서구화 할 것을 전망하고 앞으로 양송이 버섯의 가격대 하락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일신농장도 더욱 기술증진을 통해 이보다 더 나은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세계와 견줄수 있는 양송이 버섯 재배농장을 현재 구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도중 옆에서 간간히 양송이 버섯에 대한 보충설명을 거들고 있는 박재형 회장(89)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말을 이었다.

김 대표의 말에 따르면 박 회장은 50년대 일반적으로 서구등지에서 통칭되고 있는 멋슈름이란 명칭을 국내에서 양송이 버섯으로 이름붙여 처음 보급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양송이 버섯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란 표현이다. 김 대표는 앞으로 양송이 업계에 공헌하는 일이 현대회시설을 갖출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예정이다.    /조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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