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근 소장//한국농촌문제연구소
이 나라 역사에 비극을 남겨놓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그날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다.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했으면 필자인 제가 지구에 종말이 올지라도 전쟁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전쟁이 발발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00세 전후 부모님들의 가슴에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터에서 금쪽같은 자식과 남편을 가슴 깊이 묻고 그 한을 못다 풀고 운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그 심정을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은 알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정치인과 또 특정인들로 분류되는 이들이 과연 많은 고통을 받아가며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서 총탄과 포탄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전우의 모습을 목격한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기피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동원한 정치인도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 남편을 발길에 묻고 자녀를 가슴에 묻는 분들이 얼마나 가슴을 아파하며 피눈물을 흘렸는지? 입장을 바꾸어서 국민 여러분이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여러분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과 남편을 전쟁터에서 가슴 깊이 묻고 세상을 떠났던 분들의 심정을 우리모두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는 한 맺힌 그분들을 위해서 그 얼마나 아량을 베풀어 주었는가?

이제는 6.25 사변의 참전용사와 파월장병들이 정부와 정치인의 냉대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47년 전 故 박정희 대통령 재임당시에 10월 22일 명호부대와 청룡부대가 이역만리 방공전선 베트남 전쟁터로 파병이 되었다.

전쟁터는 영화의 한 장면이 절대로 아니었다.

실전의 전쟁터에서는 한 가족처럼 생활하던 전우가 한 발의 총탄으로 죽어가고 포탄에 의해서 전우의 시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에 나의 심정은 나 역시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전우의 부모님과 사랑하는 부인이 그 현장을 목격한다면 정신 이상으로 미쳐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피나는 전쟁터에서 몸을 바쳐가며 국가경제 성장에 큰 이바지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월 장병들이 정부로부터 냉대를 받고 있다.

파월 이후에 1967년 3월 24일 우리나라 최초로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되었으며 그 후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었다.

총 공사비 429억 7300만원을 투입하여 2년 5개월 만인 1970년 6월 3일에 완공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국가가 큰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은 파월장병들의 도움이 컷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6.25 사변 참전용사와 파월 장병에게는 어떻게 예우를 하고 있는지 정부와 정치인들이 생각을 해봐야 될 문제이다.

필자인 저는 1966년 2월 초에 해병대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소를 경험하고 포항 해병부대 일대대 삼중대 산하 전투 시범중대에서 약 6개월간 훈련을 마치고 월남 파병을 위해서 특수 교육을 받고 66년 10월에 파병되어 청룡부대 일대대 삼중대 배치를 받고 전투에 임했다.

용안작전과 강구작전에 많은 전우를 잃고 삼대대 열한중대의 짜빈동 격전에서 또 다시 전우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 청룡 특공대로 배치받았다.

특공대에서 특수 훈련을 받아가며 반탐강 특수작전에서 본인을 포함한 군인 몇 명이 군번 계급 성명을 기록하고 적 함대에 침투 명을 받고 권총과 수류탄만을 휴대하고 적함태 침투했다.

여기서 무기류 1,247정을 노획하여 본인이 해병 여단본부로 헬리콥터로 수송했다. 이 전과는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여 이후 최대의 전과였다.

우리나라에서 저와 같이 작전에 임했던 전우가 살아있다면 두~ 세명정도에 불과 할 것이다.

만약 유명을 달리했다면 나 혼자 일지도 모른다.

국가는 나처럼 높은 전과를 올린 사람들에게 마땅히 훈장을 수여해 주어서 후세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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