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준
(수필가, 목포시 거주)
8월 26일, 몽탄중학교 송태회 교장의 정년 퇴임식을 마친 우리들은 느러지 구경 가는 길에 동강대교를 지난다. 동강대교 가까이에는 또 새 다리를 놓고 있다.

광주에서 목포 도청으로 가는 새 도로다. 동강대교에 차를 세우고 나는 유 선생더러 월출산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멀리 보이는 산이 월출산, 그 산세가 벙벙하고 덤덤한 여느 산과는 달리 울뚝불뚝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줌이 달린 내 사진기를 가지고 왔더라면 좀 더 잡아당겨서 크게 찍었을 텐데 스마트폰이라 너무 작게 나와 월출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쉽다.

박 선생의 그랜저는 참 승차감이 보드랍고 좋다.

때마침 차 안으로는 남상규의 ‘고향의 강’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지금도 흘러가는 가슴속의 강,
아아, 어느덧 세월의 강도 흘러.......‘

영산강은 우리들의 ‘고향의 강’이다. 어쩌면 나도 아무데서나 눈을 감으면 영산강의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살아 있을 때 이야기다.

아주 눈을 감은 다음이면 산이고 강이고 떠오를 턱이 없다.

산천은 의구하되 시간이라는 빗살무늬를 타고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인생의 흔적은 타다 남은 재가 바람에 흩날리듯 허망하여 자취를 찾을 길이 막막하다.

‘느러지’ 전망대로 8월 하순의 강렬한 햇빛이 폭포처럼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박 선생 뒤로 휘돌아나가는 강물이 영산강 멋진 풍경으로 손꼽히는 ‘느러지’다. 강물 사이의 육지도 자세히 보면 한반도 모양을 닮았다 한다.

영산강에서 물줄기가 이렇게 휘감아 도는 곳은 ‘느러지’뿐이다. 물살이 느려지기 때문에 ‘느러지’라 했을까.

박 선생과 함께 목포제일중학교 근무하던 때가 벌써 30년 다 되어간다.

박 선생은 3학년 실에서 커피를 잘 타주었다.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박 선생이 타주는 커피는 맛이 각별했다.

그 때부터 나는 박 선생한테 ‘무심대사(無心大師)’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꾀죄죄하고 구질구질한 세속인들의 속기를 벗어나 어딘지 모르게 훤칠하고 거침없이 시원시원하고 호방하고 활달하고 인품이 격조 높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마도 스님이 되었더라면 큰스님이 되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취미도 고상하여 예전에는 수석을 찾는다고 전국의 산과 강을 헤집고 다니더니 이제는 또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여기저기 갸웃거린단다.

전에 살던 집을 쓸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 멋지게 집을 짓고 전시실도 마련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귀하고 값비싼 것일까만 전시실에 수석과 골동품을 진열해놓고 애장품들을 매만지며 은퇴 후의 노년을 맑고 향기롭고 그윽하게 유유자적하니 부럽기 짝이 없다.

무안군 몽탄중학교 가는 길, 배롱나무꽃과 코스모스가 화려하게 피어 있다.

원래는 백일홍나무인데 백일홍을 빨리 발음하다보니 배롱나무가 되었을까.

화무십일홍이라 했거늘 백일홍은 백일 동안이나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니 가로수로 이만큼 적당한 나무도 없을 성싶다.

지금은 남도 땅 여기저기 배롱나무 가로수가 꽤 많이 눈에 뜨인다.

찻길을 다니다보면 빨간 배롱나무꽃에서 여름의 체취를 물씬 느낀다.

백일홍 꽃이 세 번 피면 쌀밥을 먹기 때문에 ‘쌀밥나무’로 불리기도 했다던가. 한자로는 자미(紫薇), 우리 어렸을 적에는 ‘간지럼나무’라 불렀다.

나무 기둥에 손가락으로 간지럼밥을 먹이면 나무 끝 가는 가지들이 우줄우줄 춤을 추던 것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배롱나무를 만나면 옛 생각이 나서 슬그머니 나무기둥에 간지럼을 먹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엔간히 점잖게 간지럼을 먹이면 끄떡도 않았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사납게 간지럼을 멕이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가지 끝이 몇 번 끄덕끄덕하다가 마는 것이었다. 나무가 정말로 간지럼을 타서 몸을 비비꼬는 것인지, 기둥을 간질이는 진동이 가지 끝까지 전달되어 끄덕거리는 것인지 나한테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름에 무슨 코스모스? 코스모스가 망령이 들었나?

예전에는 하늘이 높푸른 가을이 깊어서야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빤쓰에 란닝구만 입고 가을운동회 마치고 가는 시골길을 훤히 밝혀주던 꽃이었다.

코스모스의 유전자가 바뀌었을까?

아니면 24절기가 엉망으로 흐트러졌기 때문일까.

아무튼 길가에서 때 이른 코스모스를 만나니 반갑다.

예전에는 시골에 흔해 빠진 꽃이 코스모스였는데 요즘에는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을 자리겠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노란 꽃들이 차지하고 있다.

외국에서 들여온 신품종인가 보다. 그러나 그 노란색 일색이 강낭콩 색깔을 닮은 코스모스의 빨갛고 노랗고 하얗다가 분홍색까지 곁들인 그 하늘하늘하고 우아하고 섬세하고 오묘한 색감을 어찌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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