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 익어가는 나주와 앙암바위 전설

 ▲김노금
/ 국제펜클럽회원·동화작가
“부족한 죄인이 너무 과분한 은혜를 입습니다. ”

“아이구! 죄인이라니요.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해 바른말 하신 것이 어찌 죄이겠습까? 무지렁이 같은 저희들이 이렇게나마 모실 수 있는 것만도 큰 영광이지요.”

“허허! 지난번에 사다주신 화선지가 아직 있는데 또.......이런.. .,...”
“삼봉어른!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하는 일이니 미안해 마시고 어서 글 쓰시지요”
“누구 한사람에게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도움만 받고 있으니....이론만으로 무장한 나의 학문은 한낮 허위의식에 가득 찬 것이 아니었을까?”

나라에서 거둬가는 세금에 탐관오리들의 패악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잘 아는 정도전으로서는 자신을 위한 나주사람들의 이러한 마음들이 참으로 눈물겹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조정에서 벼슬아치를 할 때는 어떻게 왕이나 윗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까만을 생각했는데 이 백성들이 나를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도다 ”

봄은 온 천지에 가득하고 꽃은 피어나고 있건만 정 도전은 오히려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습니다. 개경에서는 정도전이 나주로 귀양 온 뒤로 귀양에 처해진 정몽주 같은 이들도 진즉 귀양이 해제되고 다시 벼슬길로 나갔다는 소식인데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잘 계신지.... 이 흉악한 세상에 가족들은 끼니나 굶지는 않고 있는지?”

*삽화 선성경

바람도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정도전은 말을 몰아 회진 앞 바다로 달립니다. 푸르게 돋아나고 있는 보리가 끝없이 펼쳐진 회진 앞바다를 끼고돌다보면 어머니의 품같이 너른 무덤 같은 곳이 나옵니다.

“크고 작은 작은 동산 같기도 한 이곳은 분명 아주 오랜 옛날 어느 왕족의 무덤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곳을 지나칠 때 마다 늘 그런 생각이 들어 마을의 유래를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나주 땅이 태조 왕건이 뱃길로 군사를 데리고 와서 견훤과 싸워 이긴 땅이라는 사실 이전의 이야기를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바다를 끼고도는 넓은 평야는 너무나 기름져서 오랫동안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살려온 땅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태조 왕건께서 첫발을 내딛으신 이곳을 거쳐 가면 귀한 인물이 된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하지 않은가 ”

가까이 지나치다보니 그곳 구릉진 무덤가에는 에는 몇몇 여인들이 계속 주변을 빙빙 돌면서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비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이구, 삼봉 어른 아니십니까? ”
낯익은 마을 사람이 달려와 인사를 하는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혼 한지 7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이 들 부부는 자식을 포기 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을 어른이 이곳에 찾아와 빌면 귀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을 해주어서 그렇게 했더니 과연 튼튼한 아이를 낳았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는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
"그 후 1년이 겨우 지났는데 이번에 또 아이를 가졌습지요.“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날리는 청보리가 스르르 정도전의 앞으로 스러지는가 싶더니 다시 반대쪽으로 밀려갑니다. 보리가 바람에 날리는 그 모습은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 들녘의 보리들이 있어 지난해 같은 흉년에도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겠구려.”
“이렇게 좋은 들녘과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로 그나마 굶어 죽는 이는 없었습지요.”
“여보. 어서가요. 열 번 다 돌았어요.”

볼록한 임산부의 모습이 어여뻐 정도전이 흐뭇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춥니다.
“아이구! 어르신 저희들은 천 한 것들입니다. 무슨 인사를 그렇게.....”
“힘든 일을 하다가도 이 곳 을 돌 때 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어쩐지 뱃속에 있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

“그것은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임산부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태아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태교가 된다고 옛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머, 그래요. 어르신?”
“거기에다가 이렇게 적당히 몸을 놀리는 운동을 하니 뱃속의 아이가 얼마나 건강하게 잘 자라겠습니까?”
정도전의 칭찬에 두 부부는 기뻐서 입이 함박만 해집니다.
“어르신! 저희들은 갑니다요”

젊은 부부가 보리밭 길을 가로 질러가고 파아란 하늘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갑니다.
두 사람이 푸르른 청 보리 밭 사이를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삼봉어르신! 여기까지 무슨 일이신가요 ? ”
지난 겨울 내내 고맙게도 땔감이며 고기반찬을 가져다준 순덕아범이 오늘도 고기를 잡아 꿰어 메고 강가를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어이구! 오늘은 온 식구가 고기반찬을 드시겠습니다. 그려”
“예, 어르신! 순덕어멈에게 오늘은 더 맛있게 끓이라 하겠습니다. 이따 저녁은 저희 집에서 함께 드시게요.”
“그런데 그동안 제가 먹었던 그 많은 물고기들을 이 작은 낚시 하나로 잡으셨습니까?”
“예. 이 곳 강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누구든지 강가에 낚시만 드리우면 됩니다요 ”
“허허... 그래도 낚시하기 좋은 명당자리가 따로 있겠지요.”
“아닙니다요. 저쪽 앙암바위.... 그 쪽만은 좀 경사가 급해서 낚시하기가 쉽지 않지만 다른 곳은 어디든 잘 낚입니다요.”

“앙암바위?”
“예, 저쪽 .... 저긴데요. 워낙 경치가 좋고 눈물겨운 전설이 전해져오는 곳이라 처녀총각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요...”

순덕아범은 앙암바위의 새겨진 아랑사와 아비사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구렁이와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새겨졌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아도 그곳은 절벽의 형태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언제 한번 제가 꼭 모시고 가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얼른 유배령이 해제 되어 개경에 계신 마님 곁으로 갈 수 있을 런지요.”

“허허허... 그렇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가야겠습니다.”
순박한 백성들이지만 정도전 자신이 처한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마음써주는 것이 고마웠습니다.

또 한 이 땅이 다른 지역과 달리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 백성들이 맘껏 이웃과 나누며 사람의 도리를 아름답게 지켜나가는 풍습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참으로 복 받은 땅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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