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주 금동관의 주인은 누구인가?

3200년 전 고대그리스가 트로이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트로이전쟁은 ‘트로이의 목마’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진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이야기는 3000년 전에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지은 일리야드라는 시에 실려서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처럼 전해오다가, 1870년 독일의 술리만을 필두로 수차례의 발굴에 의해 베일이 벗겨져서 지금은 확실하고 체계적인 역사적 사실로 정립되었다.

영산강유역에 터를 잡은 나주는 오랫동안 남도의 정치·경제, 행정·문화의 중심지였으나, 한반도역사 5000년을 통틀어 한 번도 역사적으로 주목받아본 적이 없다. 어느 왕조가 들어서 영화와 몰락을 거듭했다는 기록 한 줄도 없다.

호남선을 타고 나주역에 내려서 대합실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입구에 금동관 모형이 놓여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타고 나주에 들어서면 나주대교 난간에 수 십 개의 금동관이 내방객을 맞이한다.

나주시청 현관에도 대형 금동관이 보이고, 얼마 전엔 나주시청 공무원의 명함에도 금동관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금동관의 주인이 누구일까?

금동관은 1918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연구회에서 발굴하였는데, 나주지역에 있는 3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 조성된 거대한 고분 36기중에서 반남면 신촌리 고분에서 대형옹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후, 고적조사연구회는 이 유적과 유물은 왜인(倭人)의 것이라고 발표하였지만 우리 학계에서 고적조사회의 결론을 인정하지 않고, 이제껏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1996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서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는 처녀분인 대형 고분 3기가 발굴 되었다. 온통 수수께끼뿐인 영산강유역 고대사의 비밀이 일부나마 드러나기 시작한 중요한 발굴이다.

복암리고분을 흔히 아파트형 고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3개의 고분에서 41기의 무덤들이, 3세기 옹관부터 7세기 백제계 석실묘까지 입체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묘의 형태는 목곽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황혈식석곽묘-다양한 석실묘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대형옹관이 28기가 나왔는데 이것을 꺼내고 운반하는데, 국내 발굴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라 아주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옹관외에도 금은환두대도, 토기류, 철대도, 철촉, 철기, 말띠드리개, 재갈, 발걸이 등 마구(馬具)가 쏟아졌다.
그동안 영산강유역은 369년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백제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영산강유역의 유물인 대형옹관, 주구(周溝, 묘주위의 도랑)를 갖춘 고분 등은 3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복암리고분의 발굴로 영산강유역이 백제에 복속된 시점이 백제의 근초고왕때가 아니고 150년가량 후인 6세기 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고대사는 우리고대사의 정사인 삼국사기나 그 외 어떤 사료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유적과 유물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적과 유물이 어느 국가의 왕조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고분과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된다. 고분 중에서 큰 것은 연인원 5,000명이나 동원한 것도 있다.

영산강유역의 세력이 인근의 고대국가와 버금가는 세력을 가지고 국가를 형성하기 직전에 백제에게 병합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근 300년 동안 주구를 갖춘 대형고분과 대형옹관을 사용했던 정치세력이 무엇인가? 나주가 자랑하는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지난봄 필자는 영산강유역의 옹관을 보러 광주국립박물관을 간적이 있는데, 우리지역의 고대사를 상징하는 옹관들이 선사실(先史室)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무거웠다.

선사시대란 역사서에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말하는데 영산강고대사회는 이미 철기를 사용하는 사회였다.

같은 철기시대에 살면서 동아시아의 중국, 일본을 포함해 국내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다 역사실에 있는데 옹관묘만 선사실에 남아있다. 유독 영산강유역만 미개한 문맹사회였단 말인가?

4세기말 우리지역의 왕인박사가 응신왕(應神王)의 초청으로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태자와 신료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지금껏 일본학문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에 있고, 해상세력으로 바닷길을 장악해서 인근의 교역을 주도했던 세력이 인근에서 사회발전이 가장 늦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지역 고대사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 조상의 훌륭한 업적도 자손이 변변치 못하면 보존되지 못하는 법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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