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과 한산도대첩

◇김창원 주필
8월 여름휴가 기간에 통영에 가면 한산대첩축제가 있고, 10월 중순에 남도 끄트머리 해남에 가면 명량축제가 있다.

명량대첩에 대한 인터넷검색을 하다보면 명량대첩 마니아 중에 명량대첩이 한산도대첩보다 더 높게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볼 수 있다.

명량대첩은 판옥선 13척을 가지고 일본수군 133척을 물리쳤고, 한산대첩은 전함 56척을 가지고 일본수군 73척을 물리쳤는데도 불구하고 한산도대첩만 임진왜란 3대첩에 들어가고, 세계4대 해전에도 포함돼 있지만 명량대첩은 이에 포함되지 않은데서 나오는 소외감인 것 같다.

전과를 가지고 단순비교하면 당연히 명량대첩이 훨씬 앞선다.

사실, 전라도 사람들은 울돌목의 명량대첩에 비하면 경남통영의 한산도 대첩에 대해서 감동이 적은 게 사실이다.

무의식중에 한산도대첩은 통영사람들의 역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전라도지역에 흩어져있는 역사유적 중에 절반은 임진왜란에 대한 유적이라고 한다.

그만큼 임진왜란은 전라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얘기다.

1592년 4월13일 해질 녘에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다음날 14일 오전 몇 시간 만에 부산성을 함락시켜 버린다.

중간에 몇 번의 전투를 치루고 19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점령됐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냥 걸어도 한 달은 걸리는데, 19일 만에 가다니, 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다.
대 쪼개지듯 한방에 수도가 절단 나 버린 것이다.

6월 17일 평양성까지 함락되자, 왕은 국경인 의주까지 도망가 중국으로 넘어갈 궁리를 한다.

결국 전쟁발발 두 달 만에 전국 8도중에 전라도만 빼고 나머지 7도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 가 버린 것이다.

그 후 7년간의 전쟁수행은 전적으로 전라도사람들과 전라도에서 공급한 병참에 의존하게 된다.

전쟁발발 3달 후인 7월13일 전라도수군은 대책 없이 밀리기만 하던 전쟁의 반전을 이루며 일본군의 예봉을 꺾는다.

그것이 한산도대첩이다.

그 전에 치루었던 조선수군의 7차례 승전(옥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등)은 적의 항전이 없는 일방적인 토벌수준의 전투에 불과해서 전략적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산도해전에 참전한 조선수군은 전라우수군의 이억기함대가 25척, 전라좌수군의 이순신함대가 24척, 경상의 원균함대 7척으로 이루어진 연합함대였다.

전체 병력의 88%가 전라도병력이다.

전라도 땅을 지켜냈던 진주성싸움이나 이치전투, 수도탈환의 큰 계기가 됐던 행주성 싸움도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전라도병력이다.

지휘관만 조정에서 파견하는 사람이었지, 나머지 장수나 군졸은 거의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쟁수행의 기본이 돼는 군량미와 병기도 전라도에서 공급해 왔다.

전라도와 일본의 전쟁인 셈이다. 임진왜란의 일본문헌을 보면 전쟁의 대상을 적국(赤國, 전라도를 지칭함)이라고 표현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이순신장군은 “약무호남이면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 하였다.

승전의 공을 호남인으로 돌리는 이 말은 장군의 호남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이 담긴 말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에서 전투 장소는 참고사항일 뿐, 진정 중요한 것은 참전용사들의 정체성이다.

통영의 한산도해전은 한산도앞바다에서 전라도수군들이 싸운 자랑스런 전라도역사의 한 부부분이다.

그래서 전라도사람들이 명량해전을 한산도해전과 비교해서 꼭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10월 말경 진도와 해남일대에서 명량해전을 기리는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번 축제를 기회로 명량해전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되살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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