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을 마치고

▲김창원 주필
1597년 9월16일 해남과 진도사이 좁은 해협인 울둘목에서 조선수군 전함 13척이 일본전함 133척을 격퇴시킨 명량해전을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7년간의 조·일전쟁을 통해서 23번 싸워서 전승을 거두는데. 적선을 불태우거나 나포한 적선이 521척이고, 재취역이 불가능하도록 대파한 숫자는 414척, 도합 935척이다.

이 과정에서 살상한 적이 12만6천4백명이다.

이에 반해 이순신함대의 손실은 단 한척의 전선이 침몰되고, 전사하거나 다친 수군이 1,020명이다.

전함손실은 500대1이고, 병력손실은 120대1이다.

야구로 말하면 23전을 전부 콜드게임승을 거둔 것이다.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상대가 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전력차이는 함포와 조총의 차이다.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110m이지만, 천자총통은 1700m이다.

조총은 탄환이 하나씩 발사되지만, 천자총통의 조란환(鳥卵丸)은 200개씩 발사된다.

조선의 개인화기인 각궁(角弓)도 사거리가 150m나 돼서 조총에 비해 지지 않는다.

단지 일본군이 단병접전에서 조선군보다 조금 낫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접전하기전에 이미 조선의 화포로 인해 적함대의 전열이 와해되어 버린다.

명량해전 두달전,

7월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선 102척을 잃고, 수군 9700명이 전사한다.

전투가 시작되자 바로 도망나온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는 판옥선 12척을 제외하고 조선수군은 전멸해 버린 것이다.

이순신은 패전 이틀후, 7월18일 하동 노량에 정박해 있는 판옥선 12척을 점검하고 작성한 장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패전휴유증으로 전의상실
② 판옥선 정원이 190명인데 한척에 90명만 남음, 척당 100명 부족
③군량미가 바닥났음, 수군 기아상태
④화약과 피사체가 절대부족한 상태, 전투수행 불가
패잔전함 12척은 전투능력도 없지만 병사들은 전쟁공포증 빠져있었다.

이때 장군이 생각해 낸 것이 섬진강유역에서 전라도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흩어진 장병들과 후퇴하는 조선군이 두고 간 군량미와 군수품이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은 다음날인 8월4일부터 15일까지 12일간 하동-구례-곡성-옥과-낙안-순천-보성에 다니면서 장병과 군량과 병기를 모은다.

330km를 우회한 것이다.

순천의 부유창과 낙안의 군량창고는 이미 불타버렸고, 순천부의 군량창고와 군기창, 보성의 조양창과 군기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일은 적의 대부대가 하루사이를 두고 이순신의 뒤를 바짝 쫒았던 아주 위험한 행군이었다.

다음은 이순신이 적을 명량해협으로 유인했던 일정이다.
8월17일; 보성을 출발.
8월18일; 12척전선이 정박하고 있는 회령포(장흥군 회진)에 도착.
8월19일;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거행.
8월24일; 어란포(해남 송지면 어란리)에 함대이동.
8월28일; 적함 50여척이 근접이동. 적함 8척 공격해옴. 격퇴.
8월29일;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함대이동.
9월7일 ; 적함 13척 접근. 아군함대 요격 적함 패주.
9월7일 밤 10시; 적함 20여척 야습해옴.
9월9일 ; 적 척후선 2척 출현.
9월15일; 16일 적의 대규모 공격을 예상. 우수영으로 함대이동.
9월16일; 일본수군 133척은 명량해협으로 진입. 이순신함대와 교전.

교전장소인 명량해협의 가항수로(可航水路)는 폭이 200m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곳이다.

적의 대함대가 한꺼번에 달려들 수 없는 곳이다.

적함대 200척중 133척만 출동해 이중 선발대로 31척이 교전을 벌었다.

조선수군의 2차에 걸친 화포공격으로 31척 전부 격침됐다.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102척도 후퇴하면서 피격되어 90척이 대파되고 10여척만 온전히 도망갔다.

조선수준은 금갑포(진도군 의신면 금갑리)까지 추격하다가 멈춘다.

그날저녁 65km나 떨어진 무안 암태도까지 함대를 이동시킨다.

통제사가 하루종일 치열한 전투로 지친 수군에게 충분한 휴식도 주지 않고 4시간이상 노를 젓게 강행군한 이유가 무언가.

만약에 일본수군이 머리를 돌려 다시 공격해온다면더 쏘아댈 화약도 없고, 포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귀항할 수영(水營)도 없었다.

장군은 이날의 전투를 천행(天幸)이라고 기록한다.

일본군은 최악의 장소에서 최악의 전술로 패배했다.

좀더 빨리 공격하든지, 우수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함대는 전력이 완비되었기에 일본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해 전투를 벌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만한 전력이 전혀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느 해역에서든지 교전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판옥선도 더 짓고, 화포, 화약, 피사체 , 군량미를 충분히 확충해야 한다.

수군의 거점인 수군통제영도 건설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

이때 육지의 전황은 조선수군의 든든한 배후지였던 전라도가 무너져 버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명량해전을 마친 이순신은 승리감에 취해있을 겨를이 없었다.

안전한 장소에서 하루빨리 수군을 재건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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